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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선교역사 -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

여성들을 위한 학교도 세워졌습니다. 1886531 의사이면서 선교사였던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명성황후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친히 이화학당이라고 이름도 하사했습니다. 이화(梨花)는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관심과 기대가 컸습니다.

서양도 여성학교는 미국이 1821, 영국이 1848에 세워질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폐쇄적이고, 강력한 남성우월사회였던 우리나라에 1886년에 여성 인재양성의 요람인 여자학교가 세워진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스크래턴은 조선여성들에게 외국인 생활양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을 통하여 조선사람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훌륭한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찾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학당도 조선식 양옥 기와집으로 지었습니다.

시작은 쉽지 않았는데, 특히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습니다. 학생도 없이 건물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미국감리교 선교부에서 재정지원이 어렵다는 통보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어렵게 학교를 설립을 했고, 학생을 모집하는데, 양반집 딸들은 집에 격리되어 접근이 어려웠고, 가난한 집은 일손이 모자라서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첫 학생은 대갓집 양반의 소실로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이 되기 위해 찾아왔고, 두 번째 학생꽃님이라는 열 살짜리 아이로 집이 너무 가난해서 떠맡겨 놓고 갔는데,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미국에 팔아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데려간다고 난리가 났지만, 부모 허락 없이는 10리도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붙잡아 두었습니다. 셋째 학생은 전염병으로 버려진 네 살짜리 별단이었고, 네 번째 학생김점동으로 아버지가 선교사를 도우면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작 네 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이화여중, 이화여고, 이화여대까지 세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김점동(박에스더)은 이후에 조선최초의 여의사가 된 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