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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 빈곤과 기독교 >

1890년대에 한쪽에서는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고, 한글성경 보급과 학교가 세워지고, 한글이 보급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부패한 정치지도들로 말미암아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온 나라는 절대 빈곤의 상태였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절대 빈곤을 극복하기보다는 권력에만 눈이 멀었습니다. 이미 1880년대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있었고, 민씨 정권은 일본군과 청군에 의해 휘둘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정부 상태였습니다. 사람을 세울 때도 인재보다는 자기 사람들만 세우다 보니, 권력에 눈먼 탐관오리들만 들끓어 나라의 형편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의지할 곳이 없었던 절대 빈곤에 처한 백성들은 평등사상을 주창했던 동학에 심취하게 되고, 일본과 서양을 배척한다는 척왜척양사상을 내걸고, 탐관오리들을 척결한다는 명분 아래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조정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겨우 청나라를 의지하여 상황 수습을 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일본에 의해 청나라조차도 어려워지고, 청일전쟁으로 한반도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간교한 일본 놈들은 조선이 집안싸움으로 무너져 갈 때, 구경하다가 힘 다 빠졌을 때, 주워 먹기를 한 것입니다.

청일전쟁으로 한반도 북쪽은 청나라가, 이남은 일본이 점거하여 한반도가 청일전쟁터가 되어 나라는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이 전쟁 물자를 징발해가서 나라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전쟁으로 시체 더미가 쌓였고, 그 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나라가 백성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국가 재난과 위기로 백성들을 보호해줄 피난처가 필요했지만, 나라는 백성을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등장한 보호처가 바로 교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