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선교사 묘원(1.역사적 배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위치한 양화진은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했습니다. 양화진은 한강을 중심 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의 교통과 국방 요충지로, 삼진(三鎭) 중 하나였고, 강물이 깊어 많은 선박이 하역할 수 있어서 전국에서 제물포(인천)를 통하여 들어오는 생산물을 도성과 궁궐로 배분하는 나루터였습니다.
양화진은 한양의 천연 방어진지로 사용되던 군사요충지이면서 이러한 천혜의 입지 조건 때문에 한양을 넘보는 외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국방의 취약지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영조 30년에(1754) 군사적 주둔지인 군진(軍陣)의 설치되면서 그 이름이 양화진이 되었습니다.
구한말에 서양 세력과 물리적 충돌은 주로 바다에서 일어났는데, 양화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했다는 빌미로 1866년 9월 프랑스 군함 2척이 양화진까지 침범하여 시위하다가 물러갔고, 같은 해 10월에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했다가 패퇴했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더 강화했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심해졌습니다. 대원군은 그들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邪敎, 천주교)들의 피로 씻겠다고,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여 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습니다. 당시 양화진 절두산에서만 1만여 명 가까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양화진은 갑신정변(1884)이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개화파의 김옥균이 1894년 조선 왕실에 의해 잡혀 와서 잔인하게 처형을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양화진은 낯선 서양의 근대화 물결과 조선의 묵은 정신 사고가 융합되지 못하고 충돌했지만, 그 충돌 이후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