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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이야기 무어 선교사

Moore, Samuel Forman(무어) 선교사는 백정과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을 위한 전도자로 잘 알려졌습니다. 조선시대는 신분 제도가 매우 엄격하여 신분 계급에 따라 그 사회적 지위가 달랐고, 심지어는 거주지, 의복, 혼인 등과 같은 일상생활까지도 차별당했습니다. 당시 백정은 천민 중에서도 동물의 피를 만진다 하여 최하류 신분으로 낙인찍고, 갖가지 차별과 억압을 당해야 했고, 결혼해도 상투를 올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망건이나 갓도 쓸 수 없었습니다.

폐쇄적인 양반사회 문화와 골 깊은 신분 차별 벽은 뛰어넘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차별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높고 높은 벽을 깨고, 백정 해방운동의 선봉자가 되었습니다. 무어는 매코믹 신학교(미국) 재학 중에 언더우드로부터 조선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신학교 졸업 후 32세 때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방전도를 통하여 곤당골에 교회를 세웠고, 예수교 학당도 열었습니다.

그 당시에 백정 중에 박성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서양에서 온 선교사가 고아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친다는 소문이 듣고,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백정으로 살지 않게 하려고, 아들 봉출이를 그곳에 보냈습니다. 봉출이는 1893년에 시작된 곤당골 예수교 학당 학생이 되었습니다. 일자무식이던 봉출이가 언문을 깨우쳤고, 후에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그로 인하여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봉출이 아버지 박성춘도 그 콜레라에 걸리고 말았지만, 천민은 치료받을 길도 없었고, 무당 굿을 해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봉출이가 무어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무어 선교사는 그를 문병할 뿐 아니라, 제중원 의사이며, 왕의 시의였던 친구 에비슨(O.R.Avison)에게 도움을 청하여 봉출이 아버지 박성춘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 사건이 백정해방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