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 선교사와 백정 박성춘(2)
봉출이 아버지 박성춘이 살던 관자골은 백정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은 양반들이 근처에도 가지 않는 차별된 땅이었습니다. 그곳에 백정 박성춘을 치료하기 위해 무어 선교사와 왕의 의사였고, 제중원 원장이었던 에비슨이 찾아왔다는 것은 그 동네에 충격적인 대 사건이었습니다. 에비슨은 친구인 무어 선교사의 부탁으로 모두가 꺼리는 그 관자골을 찾아서 환자를 치료해준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동된 박성춘이 무어 선교사가 시무하는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교회는 주로 양반들이 출석하는 교회였습니다. 양반 교인들은 모두가 천시하여 거리를 두고 상종하지 않던 천민 백정이 자기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앉아 예배할 수 없다며, 예배당 앞에 양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무어선교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고, 결국 양반들은 홍문동에 따로 교회를 세우고 떠나갔습니다.
비록 양반들은 떠났지만, 무어와 박성춘이 백정들에게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면서 백정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많은 백정이 곤당골 교회에 몰려왔고, 그들이 세례를 받고, 오랜 세월 잃어버렸던 인권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는 백정 때문에 보따리 싸고 나갔던 양반들이 회개하고, 홍문동 교회와 다시 합하여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드리는 은혜와 감동이 함께하는 역사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1905년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교회로 바꿔서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전염병에서 살아나 주님의 제자가 된 백정 박성춘은 그 아들 봉출이를 선교사의 도움으로 잘 가르쳐서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 연세대 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된 박서양교수입니다. 그는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