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선교사 <아펜젤러>
아펜젤러는 교육선교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함께 공식적으로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그는 배재학당을 세우고 민주주의와 독립 정신을 키운 선교사입니다. 그는 드루신학교 학생 신분으로 엘라와 결혼 후 두 달 만에 미국 북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육 사역에 집중했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고 학원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많은 학생이 세례를 받았고,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 정신을 고취 시켰고,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김구, 안창호, 유관순, 서재필, 이상재, 이준, 조만식, 남궁억, 이승만 등 그 외에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입니다. 1887년 10월에 벧엘이라 이름하는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예배를 드렸고, 1897년 12월26일 성탄 주일에는 벧엘 예배당을 짓고 헌당했습니다.
그는 배재학당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사인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었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문을 인쇄하였습니다. 또한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 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여 한글 성경 번역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을 섬기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내려가던 중에 선박 충돌사고로 44세에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27살에 조선에 입국하여 44세까지 17년 동안 선교사로 봉사했습니다.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서 일평생 교육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섬겼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으로 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