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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대부인

스크랜턴 대부인(며느리 '스크랜턴 부인'과 구별하기 위해서 대부인이라고 부릅니다.)이화학당을 통해서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선교사입니다. 그녀는 다른 선교사와 달리 52세라는 늦은 나이지만, 미국 감리회 여선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고, 1885년 외아들 부부와 함께 조선에 왔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과 환경으로 고생이 많았지만, 그녀는 자기 집에서 학당을 시작했는데,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고, 주로 처음 온 학생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첩들이었습니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불신과 여성 교육을 터부시하는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학생 숫자가 불어났고 나라에서 이화학당(이화여대의 뿌리)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습니다.

이화학당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문화 때문에 한동안은 조선 남자 선생이 커튼을 쳐놓고, 그 뒤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점점 많아져서 1889년에는 26으로 늘어났고, 1896년에는 기숙사생이 47, 통학생이 3이었습니다. 평균연령은 12살이었고, 8살부터 17이었습니다. 소외당하는 여성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과 함께 훌륭한 한국인의 자부심을 갖도록 지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891년에 미국에 안식년을 다녀온 후부터는 전도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조선의 남녀 차별문화 때문에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여성들만이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여성 선교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크랜턴은 전도부인을 조직하였고, 1898년에 8명의 전도 부인들과 동역했고, 전국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스크랜턴 대부인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으려고 각지에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75세의 고령에도 복음 전파의 열정이 식지 않았고, 더 많이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52세 늦은 나이에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온 후, 24년 동안 조선 여성선교와 교육에 헌신하다가 77세에 하나님 품에 안겼고,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의 여성교육과 여성 선교 우리나라 여성 근대 교육문화와 여성 인권,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돕는 일에 가장 크게 공헌한 선교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