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게일’선교사>
게일 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장로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장로교 출신이었습니다. 게일은 토론토대학 재학 중에, 1886년 미국 YMCA에서 무디 선교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선교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1888년, 토론토대학 YMCA로부터 조선 선교사 후원 약속을 받고, 12월15일 평신도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조선 입국 초기에 전국 순회 선교여행을 다녔고, 여행 중에 황해도 소래에서 평생 선교동반자인 이창직을 만나 한글을 배웠고, 전국을 순회하며 다양한 지방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서 폭넓게 조선 문화를 익혔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조선 문화와 언어를 익힌 후, 1890년부터 성경번역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성경번역 작업에 동참했고, 1891년에는 언더우드가 설립한 예수교학당(경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1892년 6월 헤론 선교사의 아내였던 해티와 결혼했고, 결혼 직후, 원산에 북장로교 선교부를 개설하고 6년 동안 원산에서 선교사역에 힘썼고, <천로역정> 등 외국 기독교 서적을 번역하여 소개했고, <한영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1890년부터 1923년까지 한글 성경번역에 공헌했고, 번역위원을 그만둔 후에도 홀로 성경 번역에 힘써 1925년에 개인역으로 신구약전서를 출간할 정도였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첫 안식년(189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고, 돌아와서 서울에서 활동했습니다. 1900년 9월부터 연못골교회(연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27년까지 재직했고,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피어선성경학교, 연희전문학교, 평양신학교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상재, 이승만 등 민족지도자들을 심방하고 섬겨서 그들이 출옥 후에 기독교인이 되게 했습니다.
특히 게일 선교사는 저술로 한국문화를 세계에 크게 알렸고, 책으로 서양 문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코리언 스케치>, <선구자> <전환기의 조선> 등 영문 저서 9권, 한국어 저서 30권을 출간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국내외 언론과 잡지에 글을 실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1927년 연동교회 목사를 사임하고, 아내의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갔고, 1937년 1월31일 별세했고, 그의 무덤은 영국에 있습니다. 양화진에는 1908년 사별한 첫 아내 해티와 두 살짜리 아들 비비안이 묻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