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을 개혁한‘무어 선교사’(2)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무어 선교사를 통하여 백정 박성춘 가정이 전도 된 후, 많은 백정이 전도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양반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백정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예배할 수 없다고 양반들의 자리를 별도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결국 양반들은 곤당골 교회를 나가 홍문동에 따로 교회를 세우고 말았습니다.
신분 차별로 오랜 세월 소외당하고, 설움을 당하며 살았던 백정들은 복음에는 차별이 없고, 하나님은 누구나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무어 선교사와 박성춘의 인도로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를 떠나 홍문동에 교회를 세웠던 양반들이 회개하고, 다시 곤당골 교회와 연합하고,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1905년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기고 교회 이름도 승동교회가 되었니다. 그 교회가 오늘날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그 교회 예배당 건물은 조선시대의 교회 건물로,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가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무어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사역에 힘썼고,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 박서양 교수입니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 의학교(연세대 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10년 동안 의대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백정의 신분으로 의대 교수가 되고, 양반을 진료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박서양 교수의 아버지 박성춘은 승동교회(곤당골교회)에서 1911년 장로 안수를 받았고, 3년 후에는 왕족이었던 이재형도 같은 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아 백정과 왕족이 함께 주님의 제자요, 형제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이 신분을 철폐하게 했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무어 선교사를 통하여 거두신 열매입니다. 차별 없는 참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생을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