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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의사 홀 이야기 >

뉴욕 빈민가 사역을 하던 닥터 홀은 여친 로제타와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선교를 꿈을 키웠는데, 마침 조선에 여자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1890년 조선에 입국했고, 닥터 홀은 1891년에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1892년에 조선에서 결혼하고 평생 조선을 위해 살았습니다.

탁터 홀은 결혼 두 달 만에 평양에 선교 개척을 위해 떠났고, 로제타 홀은 서울에서 선교에 힘썼습니다. 평양은 외국인이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타심이 매우 컸습니다. 그는 귀신의 사당에 돈을 바치지 않았다고 매를 맞기도 했지만, 헌신적인 치료 봉사에 감동되어 그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1894년에 로제타 홀도 평양에서 함께 사역했는데, 그때에 이화학당 네 번째 학생이었던 김정돔이 함께 했습니다. 그는 박유산과 결혼했고, 로제타 홀이 남편을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들의 합류로 선교에 활기가 띠었지만, 평양감사가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여 닥터 홀 부부에게 집을 제공해준 이들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는데, 탁터 홀이 서울에 알렌에게 연락하여 고종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8946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서울로 왔다가 청일전쟁 후에 다시 평양에 가서 선교했습니다. 탁터 홀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시체들로 널려 있고, 콜레라 전염병까지 창궐하지만, 희생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방역활동을 하다가 본인이 콜레라에 전염되어 서울로 왔지만, 5일 만에 만삭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1895년까지 조선에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생명을 바쳐 선교에 힘썼고, 자신의 몸 조차 이 땅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몸을 묻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갔던 아내 로제타 홀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평양에 홀 기념병원을 세우며 헌신했는데, 안타깝게도 세 살 된 딸도 이질에 걸려 아빠 닥터 홀의 곁으로 갔고, 이런 시련을 이기고 병마로 쉽게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병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