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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선교역사 - <아펜젤러-교육선교>

아펜젤러 부부의 선교는 헌 집 한 채를 구하여 학교 교실로 꾸미고, 영어를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188583일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으로 출발했습니다. 반대에 부딪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미국공사관을 통하여 고종의 허가를 받았고, 18862월에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교육 선교 사역이었습니다.

인재를 기른다는 의미를 담아 지어준 이름입니다. 고종도 인재 양성에 공감했다는 말입니다. 18866월에 정식 학교로 개교를 했고, 학생도 30가까이 늘어났고, 주로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였고, 찾아온 사람들의 대부분 교육 입문 목적은 모두 벼슬이었습니다.

당시에 조선에 가장 취약했던 부분이 교육이었고, 교육기관이 많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정부도 뭔가를 해보려고 헐버트, 길모어, 벙커 선교사를 초청하여 육영공원이라는 신식학교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조선정부가 운영하다 보니, 학생들도 배움의 열정이 별로 없었고, 조정 관리들의 이권 개입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선교사들이 크게 실망하고, 모두 떠나버려서 결국 1894년에 폐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선교본부의 후원을 힘입어 잘 운영이 되었습니다. 주로 선교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산업부를 두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출판 사업을 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생겼고, 출판사는 한문, 국문, 영문 세 가지 활판으로 인쇄한다하여 삼문 출판사라고 이름을 지었고, 출판사를 통하여 선교의 길이 열렸습니다